2001년 겨울 방학,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나는 뉴욕 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혼자 돌아서면서도, 난 오히려 설레고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살 집구하기, 학교 알아보기, 선생님 찾기...’ 앞으로의 포부와 계획이 꼼꼼히 적힌 수첩을 펼쳐보며, 난 미국에서 머물 2주 동안 해야 할 일들을 적어 보았다. 그저 여행 삼아 다녀오라는 부모님의 뜻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심 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얼마나 바라고 꿈꿔 왔던가. 막연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난 부푼 가슴으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여행이 나를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할 줄은 상상도 못한 채로 말이다.
성악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이루 내 꿈은 늘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예원학교 동기들에 비하면 시작이 늦은 편이었지만,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닌 나의 선택이었기에 더 열심히 더 즐겁게 했고 다행히 결과도 좋았다. 무엇보다 마음껏 노래할 수 있는 학교가 좋았고, 방과 후에는 레슨을 받거나 혼자 연습을 하며 음악에 묻혀 지내는 것이 행복했다. 학교 실기고사와 각종 성악 콩쿠르에서 연이어 좋은 성적을 거둘 때마다 너무 감사했고,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런데 3학년쯤 되니 모든 것이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실기고가 1등도, 콩쿠르 우승도 아무 느낌이 없었고, 더 이상 연습도 필요 없어 보였다.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실기고사 성적은 잘 나오잖아.’ 노래가 시들해지니 자연히 공부나 학교생활에도 의욕을 잃었다. ‘이 제 내 목표는 뭘까...’ 졸업 실기고사를 1등으로 마칠 무렵, 난 더 이상 꿈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자서전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난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도전과 철저한 자기 관리, 그리고 연습 또 연습... 세계 정상의 성악가인 그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나와 같은 교만함과 나태함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분들처럼 되겠다면서 이렇게 해이해져 있다니..’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용감히 발을 내딛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하나님, 저도 이분들처럼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고 싶어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게 해 주세요.’ 그 책으로 인해, 그날 내 안의 꿈은 새로이 날개를 달게 된 것이다.
나에게 새로운 꿈이 생긴 그날부터, 난 그 꿈을 위한 계획을 혼자 꼼꼼히 세워 나갔다. 그리고 부모님을 설득해 간신히 2주간의 여행을 허락받았다. 뉴욕에서 나를 맞이한 분들은 내가 관광을 위해서 왔다고만 알고 있었다. 처음 5일 동안은 그분들과 함께 관광지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으나, 마음속으로는 어서 빨리 내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싶어 안달이 났다. “사실은.. 여기서 공부하고 싶어서 왔어요.” 난 그분들에게 내 생각을 조심스레 밝혔다. “그래? 그럼 우리 집에 머물면서 공부하렴. 마침 방 하나가 남으니 잘됐네.” 그것으로 일단 ‘살 집 구하기’는 아주 순조롭게 해결된 셈이었다.
이제 학교를 알아볼 차례, 당시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던 학교는 줄리어드였다. 워낙 유명한 음악가가 많이 배출된 곳이었기에 난 늘 막연히 그곳에 대해 동경을 품고 있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원서를 넣는 것으로 두 번째 계획도 실행 완료. 마지막 난제는 성악 선생님을 찾는 일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어떻게 선생님을 찾는담..’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웠는데 조그만 창으로 반짝이는 별들이 보였다. 서울 하늘보다 훨씬 더 많은 별들이. ‘하나님,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 어떻게 제 선생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해요.’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난 평소 즐겨 하던 웹 서핑으로 선생님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 검색 창에 입력한 단어는 ‘teacher', 하지만 결과가 너무 방대했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voice teacher'. 그것을 시작으로 항목을 좁혀 가다가 운 좋게도 ‘선생님 찾기’ 사이트를 알게 되었고, 그 지역에 사는 메조소프라노를 검색한 결과 놀랍게도 딱 한분의 이름이 나왔다. 웬디 호프만, 현 메트로 폴리탄 전속가수. ‘와, 정말 대단한 분이구나!’ 난 서툰 실력으로 영문 프로필을 작성해 그의 이메일 주소로 보냈다. 세 시간마다 이메일을 확인하며 기다리다가 드디어 답장을 받았을 떄의 그 기쁨이란!
이틀 뒤, 난 악보집을 하나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웬디 선생님 댁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뜻밖에도 남자였다. 소파에 앉아 선생님을 기다리는 나, 피아노 앞에 앉은 그분, 우리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저어.. 선생님이 좀 늦으시는 것 같구나. 내가 반주를 해 줄테니 연습 한번 해 볼래?” 그의 제의에 난 선뜻 악보를 펼쳐 들었다.
내가 선택한 노리는 이탈리아 가곡인 ‘그리운 님을 멀리 떠나’를 평소에 즐겨 불렀던 곳이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노래했는데. 끝나자마자 그가 피아노 앞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는 게 아닌가. “믿을 수가 없어! 정말 천상의 목소리를 가졌구나.” 내게 한 곡을 더 청한 후에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말을 듣고 난 경악하고 말았다. “난 웬디 선생님의 남편이자,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수석 반주자 얼 바이스란다.” 너무 놀라서 얼떨떨해 하고 있는 사이, 그는 전화기 앞으로 달려가 여기저기에 연락을 했다. “보석을 발견했어요! 이아이를 꼭 보셔야 합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들이 파바로티의 매니저, 플라시도 도밍고의 디렉터였음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웬디 선생님 앞에서 난 한국 가곡 ‘동심초’를 불렀다. “과연 남편이 놀랄 만하구나.” 그 두 분을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벅찬데, 얼 바이스 선생님으로 인해 세계적인 음악인들에게서 나의 가능성을 확인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선생님을 만나게 해 달라는 내 기도는 단 한 분이 아니라 수 많은 만남으로 응답되었고, 그 만남들을 계기로 나의 짧은 여행은 유학생활로 이어지게 되었다.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합격되었다는 놀라운 소식과 함께.
그 무렵 난 한국에서 가져온 CD한 장을 놓고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CD에는 내 목소리로 녹음된 노래들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웬지 그 것이 유용하게 쓰일 것만 같은 느낌. 아주 막연했지만 웹서핑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음과 같은 공고를 보았다. ‘새로운 목소리, 크로스오버보컬을 찾습니다.’ 그곳은 버클리 음대 학장인 빌 쉐어만의 홈페이지였다. 다시 내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이분께 꼭 내 CD를 들려 드려야 할 것만 같아 우편으로 부치고 이메일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어느날 무심코 울리는 전화를 받았는데 낯선 목소리가 나를 찾았다. 유명한 음반 프로듀서인 그는. 팝페라 음반을 기획해 놀고 지난 2년간 목소리를 찾고 있던 중이라 했다. 그리하여 정말로 순식간에 미국 데뷔 앨범 준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도 전혀 새로운 장르인‘팝페라’를 통해서!
그 과정에서 나는 또 다른 소망을 품게 되었다. 한국에서 먼저 데뷔 앨범을 내고 싶다는 것. 빌 선생님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고국에 팝페라를 알리고픈 욕망은 점점 커져갔다. 결국 올해 초 ‘한국 최초의 팝테라 테너’ 라는 타이틀을 달고 많은 사람들이 나의 노래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난 그들에게 팝페라 뿐아니라 내기 있었던 놀라운 일들을 전하고 싶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기회, 새로운 만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그분에 대해.
올해 초에 있었던 대통령 취임식은 아마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목소리로 발탁되어 뜻깊은 자리에서 애국가를 불렀고, 덕분에 사람들에게 ‘애국가 소년’으로 기억되었으니 말이다. 그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어느날, 문득 어릴적의 일이 떠올랐다. 아홉 살 때인가 성경책 앞에 나와 있는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우하사‘란 가사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와, 애국가에도 나오는 것을 보니 역시 우리 하나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 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막연히 이 노래를 대통령 아저씨 앞에서 부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던 기억도 생생했다. 그 기도를 잊지 않고 이렇게 빨리 이루어 주시다니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지난 2년여 동안 내게 일어난 일들은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내게 정말로 의미있었던 것은, 단순히 나의 재능을 인정받았다거나 참 운이 좋았다는 사실 이상의 것이었다. 내 마음에 늘 새로운 소망을 주시고, 그것을 아름답게 이뤄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아버지 이심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된것. 바로 이것이 지난 일들을 통해 얻은 가장 중요하고도 값진 체험이었다.
이제 그분은 또 어떤 꿈을 내게 안겨 주실까?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을 생각하면 기대와 흥분으로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다.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 새로운 희망을 주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이제 또 한발 한발 내딛을 것이다. 그분이 주시는 꿈의 여정을 따라서...
가이드 포스트 7월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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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소년의 노래 - 팝페라 테너 임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