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알게 된 건 대학을 입학하고 처음 맞는 그 해 봄이었다. 친구들 몇 명이 그를 먼저 알고 있었고, 그의 집에 놀러 갈 때 나도 같이 따라갔다. 시각장애인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별로 낯설지 않았다. 정돈된 그의 모습은 이상하거나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렇게 까지 그를 좋아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3대째 내려오는 종가집의 맏딸로 태어나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란 나에게 그가 베푸는 따뜻함과 배려는 내 마음을 사로 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나 보다. 문학작품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영화에서 보아왔던 그 불일 듯한 사랑의 감정이 나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난 그의 모든 것이 좋았다. 그의 목소리, 그의 미소, 그의 생각, 그의 고뇌까지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했다. 그는 늘 말해왔다. 자기는 혼자 살꺼 라는 그럴 때마다 난 가슴이 아팠다. 내가 그의 동반자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처음 나갔는데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고 졸립기만 했다. 그가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줬다. 기도 끝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을 꼭 해야만 하는 것까지 말이다. 난 ‘하나님’이라고 불러보는 것도 무척 쑥스러웠지만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기도 내용은 오직 한가지 그러나 절실했다. 그분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해달라는 것. 철저한 불교집안에다 한달에 두어 번씩 제사를 지내오던 터이기에 부모님께서는 비밀로 하고 교회를 다녔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몰래 기도를 드리다가 자녀들이 잠들었는지 살펴보시려고 아버지가 방문을 여시는 소리가 나면 나는 얼른 누워서 자는 척 해야 했다. 제발 실컷 마음놓고 기도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입을 통해 내가 교회 다닌다는 사실을 아시게 된 아버지가 나를 부르셔서 대학생이 되었으니 너의 종교문제까지는 간섭하지 않겠지만 우리집 가문을 이어갈 남동생에게만은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 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모든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으면 내가 다 하려고 했다. 나는 우리학교 시간표를 조정하여 그분이 다니는 대신 대학에도 함께 가서 그 학생이 아닌데도 강의를 듣기도 했다. 강의를 듣고 나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그분이 놀리적으로 잘 설명해 주셨다. 이렇게 신학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 나의 신앙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귀가가 늦어지는 때에는 시험을 쳐서 어렵게 들어 간데다 아나운서 부장을 맡고있던 대학방송국 핑계를 댈 수 있었다. 다행히 학교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했고 교생실습도 나갔기에 집에서는 공부하러 다니는 줄로 아셨을 게다. 집에 돌아 오면 내 몸은 녹초가 되었다.
그래도 꼭 빠트리지 않고 성경을 다섯 장씩 매일 읽으면서 기도 드렸다. 그분을 집에다 모셔다 드리고 나 혼자 집에 와야되는 이 마지막 코스를 생략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결혼을 한다면 상대는 너일 꺼 라고. 내 심장은 터지는 것 같았다.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그분에 대한 나의 감정은 한결 같았다.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미팅도 그분이 대학생활의 추억이 너무 없는 거 아니냐며 해보라고 하여 두 번 해 봤을 뿐이었으며, 학내에서도 가요제나 행사 때 사회를 보곤 해서 인기도 있었고 따라다니고 편지보내는 남학생도 있었지만 나에겐 모두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오로지 그분만을 바라면서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 사람도 나를 놓고 기도를 드린단다.
하나님의 뜻이면 맺어지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난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4학년 마지막 겨울방학. 나는 많은 고민 끝에 드디어 터뜨렸다. 학교를 졸업하면 아버지가 취직을 시키실텐데 그렇게 되면 그는 학교 다니기가 힘들어 진다. 그는 혼자 다니는 대에 익숙하질 않다. 그래서는 안될 일이다. 그래서 난 결혼 상대자가 있다는 발표를 했고 상대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것도 말해버렸다. 어머니는 이성을 잃고 나를 마구 때렸고, 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 날부터 어머니는 현관에 이불과 요를 갖다놓고 누우셔서 나를 밤낮으로 지키셨다. 때리기도 하시고 얼려도 보시고 매달려서 간청도 하시고.. 지금생각하면 부모님께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분을 택하는 것은 내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었다. 한번은 엄마가 식사 준비하시는 틈을 타서 도망쳐 아파트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붙들려 가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와 그분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렇게 암울하고 전쟁 같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부모님은 나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나를 포기하셨다. 부모와 그 사람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만약 그 사람을 택한다면 다시는 부모얼굴을 볼 생각말고 부모자식간의 인연을 끊는 것으로 알고 조용히 새벽에 나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내심 무척 좋았으나 그렇게 결정하시기까지 부모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그 이후로 아버지는 아직까지 사위얼굴을 한번도 보려하지 않으신다. 하루빨리 부모님이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하는 것이 요즘의 내 기도 제목이다. 그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내가 얼마나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셔서 걱정을 좀 덜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친구들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과는 조건이 안 맞아 반대에 부딪혀 부모의 뜻에 맞는 사람과 결혼했다가 실패하거나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에 비하면 난 성공자이다. 영원한 나라에서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누리게 될 참 기쁨과 참 행복을 그와의 결혼생활을 통해 일부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76세 되시는 시어머니와 그분과 나. 이렇게 셋이서 우리는 재미있게 산다. 나는 모든 일을 그분과 상의하고 그분의 의견을 묻는다. 하다 못해 집안 장식을 할 때에도 어떠한 디자인이 낫겠느냐고 묻는다. 그분의 아이디어는 독창적이고, 그분의 상황판단은 언제나 예리하게 들어맞는다. 나는 그분의 안내자가 외어주지만, 그분은 또한 내 동행자가 되어주신다. 우리는 늘 함께 행동한다. 학교 갈 때, 쇼핑할 때, 서점에 들를 때에도... 영화나 연극도 함께 본다. 가능하면 난 모든 것을 그와 함께 느끼고 싶다. 내가 약간의 장면 설명만 해주면 된다. 벤허나 십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디어헌터 등은 우리가 함께 감명 깊게 본 영화들이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똑똑했다. 아니 하나님은 그분에게 대단한 지혜를 주셨다. 대학원과정인 대신 대학신학 연구원을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던 날 난 너무나 그가 자랑스러웠다. 졸업식 사회를 맡으신 교수님이 그분을 소개하시며 많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그졸업식장에 참석했던 졸업식 하객들이 그분을 오래 기억해 주셨다. 주택 문제도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다.
시어머니는 서울에 올라와서 20년 동안 서른번에 가깝게 이사를 다니셔야 했다. 집주인이 집세를 올려 달라면 올려줄 돈이 없어서 더 싼대 더 싼대로 이사 다니셨으니 어머니가 더 늙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시집온 다음날 이곳에 이사온 이후로 5년 동안 우리 세 식구는 이사하지 않고 이곳에서 쭉 살 수 있었다. 신앙생활 잘 하시는 집 주인이 집세를 올리지 않고 계신 것이다.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참으로 고마운 분이다. 우리는 단지 그분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헌신예배나 부흥사경회 강사로 초청 받아서 그 교회에 가면 으레히 나보고 천사 같다고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정말 부끄럽고 몸둘 바를 모르겠다. 남들은 우리의 결혼을 보고 일방적인 나의 희생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내가 가장 원하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마치 주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적인 것을 포기하는 것이 희생이 아니듯 말이다.
그분은 보다 깊이 있는 신학 공부를 위해 유학준비에 한창이다. 오늘도 그의 성경연구를 돕고 그로부터 성경을 배우면서 나는 또 한번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그가 육안의 밝음을 상실한 만큼 영안은 더욱 영롱하게 빛나고 있음을 보면서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은 이제 사랑에서 존경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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