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의 일이다. 아내가 성가대 연습으로 교회에 가고 없었다. 나는 다섯 살 박이 아들녀석 형준이와 집안에서 이런 저런 장난을 치며 놀았다. 한참 놀다 싫증난 아들 녀석이 백 원짜리 동전 하나 넣고 하는 오락게임을 하게 해달라며 졸라됐다. 나도 구두를 닦아야 하기도 해서 녀석에게 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손에 쥐어 내보냈다.
우리는 3층 빌라 꼭대기 층에서 살고 있는데, 나는 옥상 쪽으로 계단 몇 개를 올라가 거기서 구두를 닦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려니 아들 녀석이 나를 부르면서 이젠 과자를 사달라고 외쳐댔다. 구두를 닦고 나서 사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니, 녀석은 칭얼거리면서 우리 집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곧바로 사주지 않는데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런데 갑자기 녀석이 문이 잠겨졌다고 했다. 나는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볼 수는 없었지만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계속 구두를 닦았다. 구두를 다 닦은 후에 나는 문을 열어주겠다고 하면서 더듬어 만져보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문 걸이용 쇠막대기가 안에서 덜커덩 걸려 있지 않은가 추측컨대 문이 쾅하고 닫힐 때 그 쇠막대기가 탄력을 받아 자동적으로 걸린 게 분명했다. 바깥쪽에서 손을 집어넣어서 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아내는 서너 시간 더 있어야 올 터이고 나는 플라스틱 실내화에 추리닝 바지와 얇은 티 하나 걸친 차림이었다. 지팡이도 없고 또 추운 날씨에 이런 옷차림으로 아들 녀석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서 어찌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문득 아래층 할머니가 생각났다. 가서 열쇠 집으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내려갔다.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리니, 할머닌 언젠가도 한번 똑같은 일이 바로 이 집에서 벌어졌다며 그때 119를 불러 해결했다고 했다. 아차 왜 119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런데 그 할머니는 119에 전화하기 전에 지난번에 119 요원들이 하던 방식대로 한번 해보자고 말씀하시면서 어디선가 포장용 끈을 가져 오셨다. 여러 개의 끈을 이어 묶었는지 군데군데 매듭이 져있었다. 아무튼 10여분간 씨름하던 끝에 마침내 문은 열렸다. “이것도 다 쓸데가 있구먼” 할머니가 가져왔던 그 끈은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던 것이라 했다.
할머니는 또 문이 잠길는지 모르니 그 끈을 잘 간수하라고 당부하시고 아래층으로 내려 가셨다. 할머니께 감사하다는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서 있기만 했던 아들녀석이 다시 과자가 생각났는지 사달라고 졸라냈다. 나는 집에 들어가 얼른 옷을 대강 걸치고 나와 아들의 소원을 성취시켜주기 위해 가게로 향했다.
아무리 세상이 삭막하다 말들 할지라도 우리네 이웃에는 이처럼 남의 어려움을 나의 어려움으로 여기는 따스한 정이 남아 있음을 깨닫게 한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한갓 쓸모 없어 보이는, 아니 필요 없다하여 버려진 끈 하나가 위기 시에는 이처럼 소중한 역할을 하게 될 줄이야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바로 그렇다 비장애인들의 눈에 비치는 우리 장애인의 모습 또한 한낱 보잘것없고 불필요한 존재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같은 모습은 “그렇지 않다”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달라지지 않는다. 장애인인 우리 스스로가 각기 제 역할을 찾고 그렇게 찾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나갈 때 비로소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지 않을까
임경억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보문화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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