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평야는 서기48년 허왕후가 인도에서 시집올 당시에는 낙동강 하구이자 푸른 바다였다. 현재의 김해 국제공항 지역과 을숙도까지의 김해평야는 너비 12km 길이 20km 의 김해만이었다.
김해평야는 언제 생겼는가? 허왕후가 시집오는 세기에 바다였던 김해가 김해평야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가락국의 왕이 되자 다른 나라보다 가락국은 뛰어난 철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도 도마가 가져온 철의 기술 때문이었다. 사도도마는 왕궁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서양의 강철을 만드는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인도나 서양에서 가져온 철기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토기를 주문하면서 보여준 철기의 모양은 토기의 모양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가락국의 토기를 보면 마치 철기를 보는 듯 착각하게 된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철기와 장신구는 가락국에서 영향을 주어서 이형 토기가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철의 생산이 많아지자 낙동강의 가야연맹 지역에서는 생산된 철로 낫과 도끼를 만들어서 나무를 쉽게 베어서 다시 철의 제련을 할 수 있었다. 대가야 부근(고령)의 합천군 야로면에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철을 생산하여 국제적으로 수출하였던 4세기경에는 낙동강 상류의 나무가 베어지고 농경지가 넓게 개간되면서 엄청난 토사가 내려왔다.
철기 문화의 발달은 낙동강 유역 일대에 큰 변화를 주었다. 철기를 사용하면서부터 농업 생산량은 증가하고 인구가 많아지고 낙동강 상류지역은 논밭을 많이 개간하였는데 이때의 흙이 홍수 때 떠내려 와 김해만을 메우고 그러한 충적토는 김해평야가 되었으며 김해평야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김수로왕의 자손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게 된 것은 김해평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해만이 바다였다가 김해평야로 된 사실에 대하여 바다의 해수면이 올랐거나 육지가 융기한 것이라는 측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영향은 미미할 것이고 현재 김해평야를 이루는 충적토는 분명히 강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이므로 해수면의 변화와 육지의 융기와 침강은 참고사항일 뿐이다.
대성동 고분에서는 1세기의 가야국이 국제 항구였으며, 3~4세기에는 철의 왕국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철기의 발달과 수출로 낙동강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로 김해만이 4세기에는 김해평야가 되고, 해상 활동을 하던 지배층 일부가 더는 해상 활동을 못하게 되자, 신라로 건너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는 사실을 추론하게 한다. 1~3세기의 해상왕국 가야는 6세기 신라로 합병되는데, 이는 전쟁에 의해서라기보다 김해만이 김해평야가 되었기 때문이다.(대성동고분 : 철의 왕국 가야를 증명하고 있다. 가야는 사도 도마가 전해준 철기 기술로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앞설 수 있었다.)
국립 김해 박물관에는 유물에 불교의 흔적이 없다. 불교는 서기 372년에 한국의 고구려에 처음 들어왔으며 신라에는 서기 572년에 불교가 공인되었다. 서기 42년 가락국 당시에는 불교의 흔적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현재 김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주로 고분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당시 사람들은 왜 무덤을 크게 만들고 부장품으로 토기를 넣었을까? 무덤에 부장품을 넣은 이유는 영혼의 영생을 위한 것이었다. 무덤의 부장품을 보면서 금관 가야국 시대(서기 42~532)의 예배 형태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사도 도마의 영향으로 하나님 나라로 세워진 가야국은 복음적이었다. 사도 도마 자신이 예수님께 직접 받은 복음소식을 가져왔다. 가락국 당시의 애찬기와 다기를 볼 수 있다.(김해박물관 : 철기 견본을 본뜬 토기로 만든 다기와 애찬기를 볼 수 있다. 유물에 불교의 흔적이 없다.)
김수로왕이 김해에 도착할 당시 김해에는 100호에 7만5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김수로왕은 서기 42년 3월3일(음력)에 구지봉에서 주민에게 황금알 6개를 선사하고 자신이 왕이 될 것을 선포하고 구지가를 부르라고 명령을 하였다. 이때 나이는 20세 전후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알에서 나와 왕위를 오른다. 그렇다면 두 번 태어났다는 것인데 이것은 거듭난 것을 의미한다.
(계속~~~)
- 한국의 성지 김해- 조국현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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