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관계로 춘천을 얼마 동안 떠나 서울에 가 있던 허소영 선생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허 선생은 곧 춘천으로 다시 오게 된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무척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 동안 만날 수 없어서 섭섭했는데. 허 선생을 알게 된 지는 벌써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3년에 춘천에 내려와서 강원 명진 학교에서 후진들의 교육과 신앙 지도를 처음 담당하던 때였습니다. 강원 명진 학교는 제가 공부했던 모교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학교입니다. 그 때, 저는 시각 장애 학생들의 특별 진학 지도를 맡고 있었습니다.
시각장애 학생들은 활자로 된 일반 서적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점자로 책을 만들어 읽거나 책의 내용을 소리로 들을 수 있도록 녹음해서 책을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름다운 분들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춘천 교차로>라는 지면에 시각장애 학생들의 학습 자료 제작을 위한 녹음 도서 봉사자를 필요로 하니 뜻 있는 분들의 많은 연락을 기다린다 고 알림란에 알렸습니다. 며칠 후, 다정다감하고 열정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바로 허소영 선생이었습니다.
허소영 선생은 강원대학교 여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면서도 시간을 내어 학습 자료를 녹음해 주고, 직접 문제지을 읽고 학생들과 함께 풀어 주거나 책을 읽어 주기도 하면서 학생들의 고마운 학습 도우미가 되어 주셨습니다. 잠시 동안이거나 한두 번 도움을 주는 일은 쉬워도 7년을 한결같이 변함 없이 봉사한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지칠 줄 모르는 그분의 봉사는 희망을 갖고 공부를 하고자 하는 시각 장애 학생들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데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춘천입니다. 지금 찾아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허 선생의 목소리는 여전히 낭랑하고 활기에 넘쳤습니다. 환한 얼굴과 고운 마음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에 있으니 교회로 오라고 했습니다. 허 선생은 교회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습니다. 소양 제2교를 건너 소양 댐 쪽으로 오다 보면 소양 초등학교를 지나 사거리가 있는데, 직진하면 소양 댐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소양 제3교이며 왼쪽으로 가면 강원도 도교육청으로 가는 길입니다.
도교육청 쪽으로 좌회전해서 오다 보면 왼쪽으로 대한 모터스라는 카센터가 있는데, 바로 그 맞은편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바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없으니 대한 모터스 좀 못미처 오른쪽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로 오려면 디귿자형이 된답니다. 잠시 후 우리는 반갑게 만났습니다. 허 선생은 길을 잘 가르쳐 주어서 아주 쉽게 잘 찾아왔다고 하면서,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길을 자세히 가르쳐 주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놀랍다고 말했습니다. 앞을 볼 수 없으면 길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고정 관념이지요. 하지만 앞이 안 보여도 얼마든지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답니다. 옳은 길, 그른 길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죽을 길, 살 길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가서는 안 될 길, 가야만 하는 길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밤늦게 공부를 하고 기숙사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무척 난감해 하는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공중전화 부스의 전등이 꺼져 있어 도무지 전화를 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부스 안이 칠흑같이 어두워 버튼이 전혀 보이지 않아 전화를 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캄캄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전화기를 건네 받은 저는 그분이 불러 주는 전화번호를 한 번의 오차도 없이 눌렀습니다. 상대편의 신호가 가는 전화기를 받아 든 그분은 마음 한편으로는 고마워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척 감탄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에게는 캄캄하든 캄캄하지 않든 전혀 상관이 없으니 그런 것쯤이야 대단한 일도 아닌데... 세상에는 앞을 못 보고 살기 때문에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더군요. 다른 사람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행복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 내지는 존재 의미를 가슴 깊이 느끼는 듯합니다. 이 세상에 없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필요해서 생명을 주셨으니까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장 18절～19절)
김호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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