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 119:50) -
3월 초에 전화가 걸려왔는데 낯익은 목소리였습니다. “여보세요? 고보동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고 집사는 한숨을 쉬면서 집에서 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40대 초반의 가장으로 놀고 있다는 말에 염려가 들었습니다.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에벤엘선교회 사무실에 방문하면 좋겠다고 했더니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 주 고보동 집사를 만났습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도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새빛 맹인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고 있었을 때 고보동 형제는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이었으며 뇌종량으로 시신경이 눌려 시각장애를 겪게 되었고 새빛 맹인교회에서 재활교육를 받고 있었습니다. 나는 진로 상담과 점자를 가르쳤습니다.
고 집사는 말이 없으면서 차분한 성격을 지녔습니다. 재활교육을 마치고 나서 나는 수유리에 있는 한빛 맹학교를 소개했으며, 그는 고등부과정을 마치고 안마 일을 하다가 10년 전 시각장애인 자매를 만나 결혼을 하여 두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 이후 소식이 없다가 10년 만에 연락을 했던 것입니다. 나는 반가워서 점심식사를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좋아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했지만 대화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 전과는 달리 말이 없었으며 묻는 말에 겨우 대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직장이 없어 마음이 답답하긴 하겠지만 그 전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어서 혹시 우울증 증세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2년 전에 안마 일을 그만두었다”고 하면서 “안마를 왜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일자리를 찾고 있는데 일 없다”고 하면서 답답해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고 했더니“특별히 하고 싶은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대화는 자주 끊어졌고 힘든 것 같아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습니다.
오후 6시쯤 나는 사무실에서 퇴근 하려고 출입구 옆 의자 위에 놓았던 노트북배낭을 찾고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다른 곳에 놓았는지 살펴보았지만 없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고집사가 배낭을 가지고 가지는 않았겠지 하고 생각했을 때 마침 고 집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목사님 혹시 배낭을 잃어버리지 않으셨어요? 제가 배낭을 갖고 왔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멍청한 짓을 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나는 황당했습니다. 고 집사가 사무실에 방문했을 때 빈손으로 왔는데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배낭을 가지고 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심리적으로 좋지 않는 걸 알고 그의 아내와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목사님께 남편이 실수한 것을 사과하면서 고집사가 뇌종양이 재발되어 수술을 하고 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조그만 일에도 과민하게 반응을 한다”고 하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을 만났던 날도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밖에 나갔다가 들어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고 집사가 일자리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매월 한 차례 중도시각장애인재활상담카페를 하고 있으니 고 집사도 상담에 참여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월 2일 고 집사 내외가 상담에 참석했습니다.
그날 고 집사는 고정민 선생과 상담을 했으며 만족하는 것 같았습니다. 상담을 마치고 관악산 산행이 있으니 참여하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등산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참여 하겠다”고 했습니다. 4월 30일 사당역 6번 출구에서 시각장애인과 자원봉사자, 예비역 ROTC 17기 임원들과 함께 관악산 산행을 하고 점심식사를 서울교통회관 웨딩홀에서 맛있는 시사를 했습니다.
서울교통 웨딩홀 김 원영 사장님은 우리 일행에게 식사를 대접했을 뿐만 아니라 추어탕을 선물로 주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내담자 김병엽씨는 트롬본을 연주했고, 그와 함께 안마사협회 안마 수련원과정에서 공부하는 동료들은 톱 연주와 플룻 연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연주 끝나고 나서 뜻밖에 고 집사가 자진해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은 듯 남진이 불렀던 곡을 선곡하여 신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평소에는 말이 없었던 고 집사가 흥에 겨워 노래를 불렀던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짧은 시간 산행이었지만 잠시나마 답답했던 마음을 해소시킬 수 있음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기회가 되면 시각장애인 회원과 함께 자주 야외에 나가 기분을 전환시켜 재활의 의지를 북돋아 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전명훈 목사(에벤엘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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